‘먼지 풀풀’ 비포장길 아련함이 보인다

“인제와서 원통해서 못살겠다.”

이말은 60∼70년대 인제지역 생활상의 고단함을 함축하는 말로 유명하다. 지금은 ‘인제와서 원통해 후회된다’는 말로 재해석하고 있어 30∼40년 전과는 딴 세상에서 살고 있어 그야말로 상전이 벽해됐다. 60년대 인제지역은 전쟁직후 폐허였다. 인제지역 60년대 생활상을 대변하는 곳이 바로 인제읍 4거리다. 이 시기 인제읍 4거리는 인제지역 중심지는 아니었다. 1960년대 인제지역 최대중심지는 군부대가 주둔했던 남면 가로리였다.
▲ 인제읍 전경


군장병 ‘문전성시’… 전쟁 생활상 대변
최고 상권 형성… 데이트 장소로 ‘각광’


인제읍에는 전기가 없었지만 가로리지역은 전기가 들어와 야간엔 인근마을과 유흥가에 조명이 훤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양강댐 조성으로 군부대가 이전하면서 남면부흥기는 쇠락했고 인제읍으로 이동했다.

인제읍 4거리 중심으로 위쪽에는 인제군청이 자리잡고 아래쪽은 주택가와 시장이 형성됐다. 1960년대초 인제군청은 현재 인제교육청 자리였다. 1960년대 교육업무는 군청에 속해있는 하나의 부서(과)였다. 당시 인제군청 교육과는 현재 군청부지에서 근무했는데 관사를 새롭게 증축하자 관선군수와 힘있는 부서들이 신축건물로 이사가고 힘없는 교육과는 헌건물로 교환됐다. 이후 교육업무가 군청에서 교육청으로 이관, 분리되면서 인제교육청이 현부지에 자리잡게 됐다고 이순선 인제군청 기획감사실장이 40년 전의 행정비화를 소개했다.

인제읍 4거리 맨위쪽 중심지에 인제교육청이 자리잡고 군청은 왼쪽으로 밀려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주민들이 많이 있다.

1960년대 인제읍 4거리는 비포장어서 먼지가 펄펄 날렸으나 인제지역에서 가장 큰 신작로였다. 인구는 지금보다 적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인구감소는 1970년대들어 화전민 정리와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본격화 됐다고 한다. 그러나 교통량은 거의 없었다. 차량은 대부분 군용트럭들이었고 도로를 만드는 것도 군부대들이 맡았다. 현재 인제군청 오르는 길과 주변지역을 정비하는 등 도로정비에 힘쓴 사람은 김재규 3군단장이였다고 한다. 모든 도로가 군사용 도로였기 때문이다.

인제읍 4거리주변은 군장병들로 붐볐다. 4거리주변엔 영보약국, 철물상회, 김의원 등 상점들과 군인극장(현 인제문화원)과 당시 최고인기를 누렸던 술집인 고려관과 유수다방과 여관 등엔 군장병과 면회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최고의 상권을 형성했다. 인제읍 4거리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인제읍사무소 연못은 연인들의 데이트장소로 각광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60년대 생활상은 빈곤했다. 전쟁직후인데다 최전방지역이라는 삭막함때문에 ‘인제와서 원통하다’는 말이 생겨났다. 전깃불은 일부에 불과했고 대부분 등잔불과 호롱불을 사용했다. 주민들은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합강 앞산을 비롯한 인근 야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야했다. 산림감수에 걸리면 나무를 뺏기는 것은 물론 심하게 맞아야 했지만 나무없이는 살 수가 없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나무를 해야 했다. 당시 산림감수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우는 아이에게 산림감수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단 말이다. 인제읍 4거리가 포장된 것은 1970년대말이라고 한다. 도로가 정비되고 서울서 설악산을 잇는 유일한 도로인데다 전방부대에 근무하는 장병과 면회객들이 붐비면서 인제읍4거리는 1980년대까지 호황기를 누렸다. 도로변 인기있는 상점과 휴게소들은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1990년대 국도44호선 확포장공사로 우회도로가 생기고 지난해 시외버스터미널마저 우회도로 옆으로 이전하면서 인제읍 4거리의 명성은 현실에서 사라진 전설속 이야기가 되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최병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60년대 인제읍 강변에 비행기 활주로와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군인극장까지 있어 인제읍 4거리 주변은 항상 군장병들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인제/권재혁

▲ 60년대 인제읍 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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