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엔 소설가 정비석의 ‘산정무한’이란 기행문이 실려 있었다. 명문이라 생각한 국어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이를 다 외우라는 숙제를 안겨 주기도 했는데, 그 바람에 외게 된 문장 중 마의태자 대목을 다시 떠올려 보면 이러하다.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지 또 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던가.”

‘수유(須臾)’는 ‘아주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낱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수유’는 10의 마이너스 15 제곱에 해당한다. 즉, 천조 분의 1로 0을 세다 보면 눈이 아물아물해지는데. 음수로 표기하면 0.000000000000001이 된다. 그 유명한 ‘나노(nano)’는 십억 분의 1이며, ‘마이크로(micro)’는 겨우 백만 분의 1일 따름이다. 그러니 ‘수유’는 참 그야말로 얼마나 짧은 시간인가. 우리들이 자주 쓰는 ‘찰나(刹那)’는 이보다 더해 10의 마이너스 18 제곱에 해당되니, ‘눈 깜짝 할 사이’라 하여 오히려 부족한 시간이다.

‘수유’니 ‘찰나’니 하는 말은 대체로 불가에서 나온 말이다. ‘금강경’엔 ‘갠지스 강 모래알갱이 수’라는 ‘항하사’를 비롯해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대수’ ‘겁’ 같은 큰 수를 나타내는 어휘도 나온다. ‘무량대수’는 10의 88제곱, 0이 68 개나 붙는 수이다. ‘아미타불 및 그 땅의 수명이 한량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항하사’ 밑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숫자 단위 어휘가 있는데, 역으로 일, 십, 백, 천, 만, 억,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이 그들이다.

사실 ‘억’이나 ‘조’는 쓰지만 ‘경(京)’에 이르면 익숙지 않기에 수의 개념이 흐려진다. ‘경’은 10의 16 제곱, 1조의 1만 배다. 1자 다음에 0이 16 개나 붙는다. 우리나라의 총 금융자산이 사상 최초로 ‘경’ 단위를 기록했다. 무려 1경3조6000억 원이다. 경제의 무게가 느껴지는 수치이지만, 금융자산이 별로 없는 서민에겐 꿈에서나 나올 숫자다.



이광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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