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로 뻗은 산자락 끝 중생 고락 끌어안는 관음상 있네
의상대사 해변 굴속 관음보살 친견 후 창건
무지개 모양 홍예문· 7층 석탑 자태 빼어나
2005년 산불 후 대규모 복원 옛모습 되찾아

▲ 낙산사 해수관음상
▲ 무지개 모양의 석문 홍예문
#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창건한 낙산사

설악산의 줄기가 바다로 뻗은 오봉산(五峰山)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낙산사. 1300년의 역사를 지닌 낙산사는 남해의 보리암,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불리고 있다.

초겨울 화사한 햇살을 그대로 받으며 바다를 향해 단정히 자리 잡은 가람(伽藍)들은 세속에 찌든 내방객을 차분히 어루만져주며 화마의 폐허는 흔적도 없이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의상대사가 오봉산에 상주하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창건(671년)하였다는 낙산사.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한 뒤 돌아왔을 때, 대비진선(大悲眞身, 관음보살)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불렀다. 서역에서는 보타낙가산((寶洛洛伽山)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 지은 것이다.

의상이 이곳에서 수행한 지 7일 만에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수정염주 한 벌과 여의보주 한 벌을 주었다. 그리고 관음보살 진용(眞容)이 나타나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典)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자 이곳에 절을 짓고 낙산사라 부르고는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의상법사는 말없이 떠나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천년고찰 낙산사는 수없는 외세의 침입으로 성보들은 강탈당하고 전각들은 화재에 휩싸이면서 전소와 중건을 반복하는 아픔의 역사로 이어져왔다.



# 아름다운 소리로 삼라만상을 깨웠던 동종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는 것이 무지개 모양의 석문(石門) 위에 누각을 세운 홍예문(虹霓門)이다.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세조가 낙산사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

홍예문을 통과하면 종각이 보인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낙산팔경의 그 첫 번째가 낙산사 저녁 종소리(洛迦暮鐘)였다. 그만큼 아름다운 소리로 삼라만상을 깨웠던 동종이다. 하지만 1469년 예종이 그 아비인 세조를 위해 만들었던 이 범종은 산불로 처참하게 녹아내렸다. 지금은 문화재 전문가와 금속·조각·음향 전문가 등 전문 인력들을 총동원하여 1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정교한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종각에 안치하였다.

빈일루와 응향각을 지나 7층 석탑 앞에는 낙산사의 중심법당인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자리 잡고 있다.

원통보전에는 조선 시대 만들어진 건칠관음보살좌상(洛山寺乾漆觀音菩薩坐像)이 독존으로 모셔져 있다. 장지에 옻칠을 한 관음상은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얼굴 표정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지난번 화재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였다가 중건과 함께 다시 제자리에 봉안되었다.

원통보전 앞 정원에는 칠층석탑이 단아하게 서있다. 6·25동란이 남긴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탑은 원래 의상 스님이 3층으로 세운 탑을 세조의 낙산사 중건 명을 받은 학열 스님이 다시 쌓았다.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원장(垣墻)은 세조의 명으로 쌓은 담장이다. 이 원장은 황토와 진회색의 기와가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어 색조의 대비와 원통보전의 기품을 살려주는 아름다운 담장이다.

▲ 낙산사 동종


# 동해에 왔다가 참배하는 곳 해수관음보살상

원통보전을 나와 해수관음보살상으로 가는 길목에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표석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동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해수관음상이 기다리고 있다. 해수관음상은 16m 높이의 거대한 크기임에도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가 아름답게 이루어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단함과 소원을 가장 먼저 듣고 현세에서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는 보살이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참배하기 위한 목조건물이 있는데, 관음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에 들르면 빠짐없이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관음전에서 보타전으로 내려오는 숲 길 옆으로 100m가량 내려가면 공중사리탑이 있다. 1683년에 홍련암에서 개금불사를 거행할 때 문득 방안이 서기로 가득 차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석겸 스님이 이 탑을 쌓고 그 구술을 봉안했는데, 그 공사가 무려 9년이나 걸렸다.

공중사리탑을 지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보타전이 있는데,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지난 산불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현재 보타전 앞에는 누각 형태의 보타락이 있으며, 그 앞에는 큰 연못이 있다. 보타전과 보타루를 지나면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가는 길이다.



# 천년고찰, 김홍도의 ‘낙산사도’로 다시 태어나다

2005년 4월 5일 식목일. 별안간 일어난 대형 산불이 천년고찰 낙산사를 폐허로 만들었으나, 다행히 복원중창이 원활히 진행되어 이제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소실된 전각들은 새롭게 중건되었지만, 아직 세월과 인간의 손길이 묻지 않아 조금은 황량하게 느껴졌다.

화재 복구를 위해 문화재 발굴 조사를 실시, 낙산사 지층에 시대별 중건 흔적이 7층짜리 떡시루처럼 포개져 있었음을 발견, 2여 년에 걸친 발굴조사와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복원위원회에 자문해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洛山寺圖)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가장 크고 장엄했던 조선 세조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번에 새롭게 태어난 낙산사는 소실 이전보다 오히려 원형에 더욱 가까워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통보전이 웅장한 자태로 다시 태어났으며, 화재 당시 스님들이 지켜낸 지불(紙佛)인 건칠관음보살과 칠층석탑도 옛 모습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달을 떠나보내는 집 송월요(送月寮), 천년의 향기가 서려 있는 고향실(古香室)이 사료에 따라 복원되었다.

원통보전으로 가는 입구에는 조선 고종 때 선학스님, 해성스님이 중건했다 한국전쟁을 거쳐 소실됐던 해를 맞이하는 누각 빈일루(賓日樓)가 단원의 ‘낙산사도’에 나오는 그대로 복원됐다.

그 이외에도 설선당, 정취전, 응향각 등의 건물이 옛 문헌의 기록에 따라 되살아 나면서 낙산사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특히 앞으로 문화재의 소실을 피하기 위해 화재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는 연기센서, 불꽃센서와 방수총을 비치하여 다양한 화재 예방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귀중한 문화재가 다시는 화재로 소실되는 일이 없으리라.



▲ 의상대사가 좌선수행한 의상대

옛 문인· 화가에게 영감 안겨준 안식처

낙산사는 관음성지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절경으로 많은 화가,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다.

세조, 성종, 숙종과 같은 왕들은 물론 보우(普雨), 서산과 같은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낙산사를 안 다녀간 사람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극, 정철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유자량, 이규보, 정추, 안축 등의 여러 유명한 문인들이 많은 시문을 남겼고,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남효온, 정사룡, 최립을 비롯하여 이민구, 윤증, 김창흡, 이해조 등이 낙산사를 탐방하고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1592년 임진왜란 피난 중에 부인이 첫 아들을 낳고 전란 통에 아내와 아들이 잇달아 죽는 불행을 당하자 이듬해부터 낙산사에 3년 정도 유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그해 10월 시화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을 집필하고 다음해 과거에 급제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허균은 낙산사에 관한 3편의 시를 남겼다.

낙산사를 소재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겸재 정선, 서암 김유성, 단원 김홍도 등이 대표적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낙산사에 들러 동해의 장엄한 일출을 보고 금강산 일대 ‘해악진경’여덟 폭을 병풍에 ‘낙산일출(洛山日出)’ 이란 작품을 그려 넣었다.

또한 서암 김유성은 1764년 조선통신사를 수행, 일본을 방문하여 세이켄지(靑見寺)에서 그려 준 ‘산수화조도 압회첩병풍(山水花鳥圖 押繪貼屛風)’여섯 폭 중 네 번째로 보이는 그림이 ‘낙산사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원 김홍도 또한 1778년에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여행하면서 ‘낙산사도’를 그리게 된다.

단원의 ‘낙산사도’는 바다 쪽 하늘에서 낙산사를 내려다보는 조감도 형식으로 그렸기에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를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 상공에서 본 낙산사 전경

수려한 절경· 장엄한 일출에 의상대에선 누구나 시인 된다

일출맞이 일품… 낙산사 모태 홍련암 인근에 위치

● 낙산사의 절경 의상대

의상스님이 좌선(坐禪) 수행을 한 곳이지만 세인들에게는 천하의 절경으로 일출을 맞이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의상대(義湘臺)는 18세기까지 존재했었으나 그 후 폐허가 되어 1925년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건의로 주지 김만옹(金晩翁) 스님이 정자를 새로 짓고 정식으로 의상대라 이름 붙였다.

수려한 절경과 장엄한 일출로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시인 묵객들이 앞 다투어 찾아 의상대를 노래했다. 낙산을 제대로 즐기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낙산사의 저녁 종소리와 설악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한밤중에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 망월대 앞 동해 모래사장에 내려오는 기러기 떼, 멀리 망월대 앞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길게 뻗어 내린 남대천의 물줄기, 망월대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정취를 보고 느껴야만 한다.

세월이 흘러 세대는 바뀌고 환경도 변했다. 한밤중의 다듬이 소리, 저녁밥 짓는 연기는 이제 볼 수 없다 해도 낙산을 즐기고 감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모두 낙산을 바라보는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우고 주변과 하나되어야만 낙산을 제대로 감상하는 비법이 아닐까.



   
#낙산사의 모태 홍련암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는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하던 장소로 낙산사의 모태가 된 곳이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온 의상대사가 굴속으로 들어간 파랑새(靑鳥)를 보고 그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紅蓮)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관음보살을 친견한 의상대사는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

지금의 홍련암은 1975년의 중창 때 지어졌으며, 안에 봉안된 탱화 역시 같은 해에 조성되었다. 법당 마루에는 8㎝의 정사각형 구멍이 나있다. 이 구멍을 통해서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10m의 낭떠러지 바위 틈새를 볼 수 있다. 이 바위 틈새는 관음굴이라고도 하는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거나 오체투지를 한 자세여야만 내려다 볼 수 있다. 범부의 눈에는 오직 바위 틈새로 파도소리를 내며 들락거리는 파도가 보일 뿐이다. 하지만 관음굴로 밀려오는 파도와 해조음조차 지극히 낮아지는 자세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다.



▲ 낙산사 원통보전과 7층 석탑

[시련의 연속 낙산사]  전란·전소 속 1300년 역사 고스란히 간직

임진왜란· 한국전쟁· 산불로 피해

대부분 문화재 소실· 재건 되풀이

2005년 4월 4일 밤 11시 53분 화일리에서 발화된 산불이 불과 1시간 30분 만에 3㎞나 떨어진 마을 사천리를 덮치기 시작하였다. 초속 30m의 강풍을 타고 동쪽으로 번진 불길은 16개 마을을 삽시간에 휩쓸고 지나가며, 무서운 기세로 번져나갔다.

무섭게 번져가는 화마에 가재도구와 소, 돼지 등으로 아수라장이 된 아비규환의 밤이 지나고 아침 6시 날이 밝아오면서 진화작업을 위해 헬기가 투입됐다. 그러나 몸조차 가눌 수 없는 강풍에 요란한 헬리콥터의 굉음조차 묻혀버리며 산불은 순식간에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다.

오전 10시쯤 18대의 진화 헬기의 활약으로 큰 불길이 잡히는 듯 했다. 그러나 오후 들어 강풍을 타고 또 다시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4월 5일 식목일 오후 4시. 관음보살의 성지인 낙산사로 번진 불길은 울창했던 소나무 숲까지 숯덩이로 만들고 순식간에 주전인 원통보전과 홍예문, 요사체 등 목조건물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제작된 낙산사 동종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렸다.

이렇게 문화재 보고인 1300년 역사의 낙산사가 끝내 ‘화마’를 비껴가지 못하고 전소되었다. 그나마 원통보전에 있던 스님들이 지켜낸 건칠관음보살좌상과 탱화, 의상대와 홍연암은 화마가 비껴가 다행이었다.

한국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자 관동팔경의 하나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천년 고찰 낙산사. 서기 671년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 창건했으며, 그 직후에 의상과 함께 신라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되는 원효 대사도 이곳을 찾기도 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한국 고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었다.

그런 낙산사는 1300여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동안 수차례 전란과 전소로 중창과 중건을 거듭했다.

서기 786년 화재로 인해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탄 낙산사는 858년 범일스님이 불전과 보살상을 지으며 중창 한 후 1489년 산불로 관음전이 불에 탔으며, 1592년에는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됐다.

또한 1777년에 화재로 인해 원통보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자 이후 200여년에 걸쳐 중수와 중건, 중창했으나, 또다시 1930년 화재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 한 번 전소됐다.

현재의 낙산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53년부터. 이형근 장군이 원통보전과 종각 등 새로 지으면서 중창했고, 1972년 원철 스님이 추가로 중창을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낙산사를 조성했다.



▲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

이진호 양양군수는 “신라 문무왕 11년인 671년, 의상대사가 오봉산 자락에 창건한 낙산사는 국내 대표적인 관음성지로서 13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양양군민들은 물론 전체 국민들과 고락을 함께해온 민족의 사찰”이라며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과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등 많은 문화재를 갖추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이진호 양양군수로부터 낙산사의 복원 및 관리보존 계획과 가치제고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불교문화·휴양·관광 한번에 가능한 곳 조성”

- 천년고찰 낙산사는 2005년 화재로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상당부분 소실됐다가 최근 들어 복원됐다. 국민의 정성으로 제 모습을 찾아가는 낙산사의 복원현황과 향후 관리보존 계획은.

▲ 이진호 양양군수
“우리군민들은 지난 2005년 화마가 낙산사를 덮었을때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망연자실했다. 그 이후 4년간의 대역사를 통해 낙산사는 전국민의 성원과 각고의 노력 끝에 산불피해의 악몽을 뒤로하고 웅장한 원통보전을 복원한 데 이어 중앙 누각인 빈일루와 응향각, 설선당, 정취전 등 주요 전각을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 복원해 2009년 10월 12일 모든 복원불사를 완료하는 회향법회 법요식을 열었다. 또한 더 이상의 재난으로 인해 낙산사와 주요 문화재가 훼손되거나 소실되는 일이 없도록 방범설비와 소화시설 등을 설치했으며 내년도에는 문화재 재난방지시스템을 구축,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지속적으로 힘쓸 예정이다.”



- 1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낙산사의 문화재적 가치제고방안은.

“천년고찰인 낙산사는 화마를 극복하고 역사 및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낙산사가 있는 양양 강현면 전진리 55번지 일원 26필지 9만2637㎡에 대해 문화재청으로부터 2008년도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95호로 지정됐다. 낙산사 사적에는 보물 499호인 낙산사 7층석탑을 비롯해 보물 1362호 건칠관음보살좌상 등 3건의 국가지정문화재와 강원도 유형문화재 33호 낙산사홍예문, 34호 낙산사 담장 등 지역유형문화재 6건이 포함돼 있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절터 발굴 결과 통일신라시대 유적들이 다수 확인됐고 역사 및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군은 앞으로 낙산사의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체계적인 보존관리를 통해 종교적 의미와 함께 소중한 문화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 낙산사 등 지역내 문화재를 활용한 양양지역 관광산업활성화 방안은.

“세계적 명산인 설악산과 맑고 푸른 동해바다 사이에 자리잡은 우리 양양군은 관동팔경의 으뜸인 낙산사와 80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오산선사유적지, 선종의 발상지인 진전사, 오색약수와 온천, 웅장한 설악산 대청봉과 깨끗한 해수욕장 등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의 환경을 그대로 간직한 청정 고장이다. 또한 국내 최고의 송이 산지이며 연어가 가장 많이 회귀하는 맑은 물 남대천이 있어 해마다 송이축제, 연어축제, 해맞이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과 문화적 자원을 바탕으로 각박해진 현대인들이 양양에 와서 편안한 휴식을 찾도록 향후 골프장, 해양워터파크 등 대형 관광시설의 유치를 통해 관광기반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다. 또한 불교와 사찰문화를 통해 휴식을 느낄 수 있도록 템플스테이를 활성화하고 산사음악회 등을 개최해 문화와 휴양, 관광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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