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설위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을 한 근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한다. “동물은 단지 생물학적 자동기계일 뿐이다.” 동물이 단지 생물학적 기계일 따름이라니? 귀를 의심할 놀라운 말이 아닌가. 르네 데카르트는 이렇게 오직 인간 중심적인 생명관을 가진 반(反)생태적 철학자였다.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남의 살을 먹어야 하는 우리는 과연 동물의 생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데카르트와는 달리 불교는 땅에 붙어사는 것 곧 식물은 먹더라도 땅에 발이나 배를 깔고 꼬물거리는 것 즉 동물은 죽이지 말자고 결론을 내린다.

‘동물기’로 유명한 E. T. 시튼은 사냥에 앞서 사슴에게 바치는 북미 인디언들의 노래를 기록해 놓았다. “작은 형제여, 너를 죽여야 해서 미안하다 / 그러나 네 고기가 필요하다 / 아이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있다 / 너의 용기와 힘 그리고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마 / 작은 형제여 나를 용서해 다오.” 베어하트가 쓴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엔 인디언들의 사냥 원칙이 나와 있다. “절대로 화가 나서 동물을 죽이지 말라. 얼마나 많이 죽일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재미로 죽이지도 말라. 살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늘 동물에게 존경심을 보여라. 꼭 죽여야 하는 경우에는 양해를 구하라.”

기막힌 얘기다. 다른 목숨을 먹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비극이므로 먹고 먹히는 방식으로 결속된 생명의 고리, 그 고리의 심오함, 그러므로 이렇게 다른 생명체에 감사와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럼에도 지금 이 땅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돼지 생매장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암담하고 참담하고 부끄럽고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일그러진 지구 환경인 지진과 온난화 그로 인한 태풍 폭우 폭설 해일 등이 인간에 대한 자연의 반격이라 해석하듯 구제역 역시, 아니 구제역이야말로 축산 고기를 그토록 집요하게 탐식하는 반생태 반생명적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자연의 심각한 경고다.

구제역으로 살처분 된 소와 돼지가 이미 320만 마리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며칠 전 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등 35 개 단체가 생매장 위주 구제역 살처분 개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앞서 ‘생매장 돼지의 절규’라는 영상물이 상영됐는데, 매몰 압사 화면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우슈비츠와 다름없는 학살”이요, “이 죽음들이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라 분노했다.

17 세기 병자호란 때 소의 전염병이 크게 돌자, 인조는 “죄는 내게 있고 백성에게 있지 않은데 차마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들 구덩이에 파묻히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오늘의 매몰 악몽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인간 문명 또는 역사의 진보라 주장하는지 묻게 된다.

존 쿳시의 ‘동물로 산다는 것’, 소로우의 ‘월든’,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같은 책을 다시 읽어 봐야 겠다. 구제역 매몰 사태와 관련해 특히 앨런 와츠의 ‘해탈의 길’을 읽자고 권한다. 그는 요리와 먹는 일에 대해 주장한다. “먹되, 감사하면서 지극히 정성스레 잘 요리해서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요구한다. 참으로 혐오스러우므로 텔레비전 음식 프로그램 진행자·출연자·리포터 피디들, 먹는 것을 갖고 희희낙락하면서 박수치며 괴성을 지르는 역겹고 천박한 장면을 만들어 내보내지 말라. 우리 어렸을 적 어머니들은 먹는 것을 갖고 지나칠 정도로 장난치지 않고 차분히 정성스레 요리했다. 저 인디언들의 들소 사슴 연어 등 먹는 대상에 대해 취했던 경건한 태도를 한 번쯤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방자한 태도로 까불며 먹다가 필요하면 가차없이 소 돼지를 생매장하며 데카르트의 후예인듯 반생태 반생명적 잔혹 잔인함을 서슴지 않으니, 우리 현대인들은 진정 ‘나는 생각하며, 고로 존재’하는가?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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