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애환 담은 우리소리… 5000년 역사를 싣다
고단·무료함 잊고 고향생각 달래기도
떼꾼간 교류 서울·경기로 아라리 전파

정선아리랑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를 꼽으라면 ‘뗏목’을 빼놓을 수 없다. 정선에서 불려진 ‘아라리’라는 민요가 전 국민의 노래로 전파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뗏목’이라는 운송수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뗏목은 한강의 최상류지점인 정선을 비롯한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와 아리랑 소리꾼을 만들어낸 매개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때문에 이른바 뗏목아리랑은 정선아리랑의 소리를 찾아가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에 정선아리랑의 확산 경로라고 할 수 있는 정선 아우라지에서 동강과 한강의 물줄기를 타고 한양 나루터로 흘러들어간 아리랑의 현장과 소리꾼을 추적해 본다.


 

▲ 정선주민들이 정선아리랑제에서 뗏목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선군


■ 떼꾼과 뗏목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다. 당시 일제강점기 저항정신이 담긴 삽입곡은 오늘날 흔히 알고 있는 아리랑의 음으로 편곡되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번째 사건은 학계에서 공통적인 의견으로 제시하고 있는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1865∼1872)이다. 경복궁 중건시기 팔도사나이들은 고향을 떠나 부역꾼으로 모였다. 이들은 고단한 하루를 넘기며 가족과 연인들의 생각에 한탄을 늘어놨다.

이 때 뗏목으로 엮은 목재의 수송을 위해 정선에서 한양을 오가던 떼꾼들은 ‘아라리’를 부르며 외로움과 고향생각을 이겨냈다. 이는 정선아리랑 가사에도 찾아볼 수 있다.


가래껍질 느릅껍질 동아줄 틀어서 당태목

대고 떼를 매서 마포나루를 갑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정선에서 온 떼꾼과 부역꾼들이 밤마다 놀이마당에서 부른 ‘아리랑타령’을 익혔다. 그리고 부역이 끝나면서 전국 각지로 흩어져 각 지방색에 맞는 노래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 동강아리랑

도로와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정선을 비롯한 강원도의 목재는 주로 뗏목을 이용하여 운반됐다. 산에서 나무를 베면 스무자(약 6m)씩 끊어서 떼를 맨다. 이렇게 제작된 뗏목은 현재 남한강 최상류인 정선군 북평면 여량리 아우라지에서 조양강과 동강의 물살을 헤치고 한양까지 1000리길의 머나먼 여행을 출발한다.


물결은 출러덩 뱃머리는 울러덩 그대 당신은

어데로 갈라고 이 배에 올랐나


아우라지와 정선 곳곳에서 영월까지 동강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뗏목을 ‘골안떼’라고 했다. 험한 골짜기 안의 위험한 물길이어서 기술 좋은 떼꾼들도 영월까지 보통 2∼3일이 걸렸다. 보통 서울까지는 15일 정도 걸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주요 구간마다 떼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여울이 곳곳에 숨어 있고 날씨 여건에 따라 한달여가 소요되기도 했다.

남편을 떠나보낸 아낙네들은 정선아리랑을 청승맞게 부르곤 했다.


우리집의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

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다녀가셨나


아우라지 밑의 상투비리, 용탄의 범여울,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의 황새여울, 영월읍 거운리 어라연 아래의 된꼬까리 등은 주변 우뚝 솟은 바위와 급한 물살의 여울에 뗏목이 파손되거나 떼꾼의 목숨을 앗아가는 위험한 구간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정선아리랑 가사에 ‘황새여울’ ‘된꼬까리’ 등의 지명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전산옥 아리랑

떼꾼들이 동강의 험난한 물길을 지나 물살이 완만한 곳에 이르면 어김없이 주막을 만나게 된다. 해방 이후 정선에서 영월에 이르는 물길에는 100여곳에 이르는 주막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영월에 있는 만지 나루터에서 1960년대 후반까지 주막을 운영하던 여주인 전산옥(全山玉·1909∼1987)에 대한 추억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산옥은 정선아리랑을 맛깔나게 불러 떼꾼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실존인물로 유명하다.


산옥이 팔은 객주집 베개요

붉은애 입술은 놀이터 술잔이세

 
산에 올라 옥을 캐니 이름이 좋아 산옥이냐

술상머리서 부르기 좋아 산옥이로구나

 
천질에 만질에 떼 품을 팔아서 술집 갈보

치마 밑으로 다 들어가구 말았네


떼를 타는 일은 위험한 일에 속했기 때문에 수입이 좋은 편이었다. 당시 떼꾼들은 벌이가 상당해서 ‘떼돈 번다’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떼꾼들은 주막집의 아가씨들과 회포를 풀며 소리자랑으로 한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떼꾼들은 한양 마포나루에서 정선 땅에 다시 돌아올 때는 빈손인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이 같은 떼꾼들의 교류 덕분에 산촌의 소리인 정선아리랑이 서울 경기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김형조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는 “정선아리랑은 단조롭고 소박한 가락에 산촌마을 정선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서민들의 소리”라며 “떼꾼들처럼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거나 무료함을 달래는 두줄짜리 형식으로 이야기하듯 즐겁게 부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선/박창현 chpar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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