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아리랑 가락 이어 조선족 스타일로 재탄생
정선·진도·밀양아리랑 변형 한민족 뿌리·정서 담아내
정선아리랑 전승 미미
연변-정선 교류 활발 중국에 확대 전파 기대

한민족 제2의 애국가인 아리랑은 전국 방방곡곡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갔다. 특히 중국 내 조선족 거주지인 지린성(吉林省·길림성)과 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 일대는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의 전초기지로 한민족의 한을 고스란히 간직한 눈물의 보금자리다. 이곳은 정선아리랑을 비롯한 국내 3대 아리랑은 물론 본조 아리랑 등 각 지역의 무수한 아리랑들이 이주민들의 입을 타고 흘러 들어가 모국을 향한 그리움을 대변하고 있다. 본지 취재팀은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의 안내로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일원을 방문, 조선족 문화예술인과 현지 주민들을 만나 정선아리랑의 흔적과 조선족 아리랑에 담긴 주민들의 애환을 취재했다.


 

▲ 전화자 교수(사진 왼쪽)와 리상각 시인은 중국 조선족 아리랑의 전승실태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중국 지린성/최경식


■ 이주 1.5세대의 아리랑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에서 만난 조선족에게 아리랑은 모국에 대한 향수를 넘어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분신’과 같았다. 제2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으며 국경을 넘은 이들에게 아리랑은 애틋하면서도 간절했고 자부심마저 남달랐다.

올해로 창립 61주년을 맞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대표 시인 리상각(77)씨를 만났다.

그는 3살 무렵 강원도 양구에서 이주해왔다. 이른바 연변 이주 1.5세대인 셈이다. 그동안 조선족의 대표매체인 연변문학 편집장, 천지주필을 역임했다.

리 시인은 현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아리랑을 주제로 한 다양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아들 리동혁(46)씨도 ‘백수아리랑’이라는 시를 쓴 문인이다. 그는 “조선족에게 아리랑은 어느 무엇보다 각별하다”며 “아리랑을 통해 조선족의 위상도 더욱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족 아리랑이 조금씩 변형이 됐지만 민족의 뿌리와 정신만큼은 한국의 정서를 쏙 빼닮아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족 아리랑은 1950년대 이후부터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창작돼 시대적 변화를 거듭했다. ‘아리랑련곡’, ‘장백의 새아리랑’, ‘새아리랑’, ‘연변 아리랑’ 등이 그것이다. 리상각 시인은 이를 두고 “조선족 나름의 ‘아리랑 꽃씨’가 피었다”고 표현했다. 또 “이들 아리랑을 들으면 대한민국 3대 아리랑이 적절히 혼합돼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조선족들에게 아리랑이 구전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본조 아리랑이다. 정선과 진도, 밀양 아리랑 등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을 조금씩 변형해 조선족만의 스타일로 재탄생한 아리랑도 더러 찾을 수 있다.

이중 정선아리랑은 여타 아리랑에 비해 대중화가 많이 이뤄지진 못했다. 이는 조선족 이주 역사 가운데 정선 주민들에 대한 발자취와 기록 등은 쉽게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지 조선족들의 설명이다.

리 시인은 중국 정부가 아리랑을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에 대한 조선족들의 일반적인 견해도 들려줬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중국이 아리랑을 빼앗아간다고 여기는 것과 달리 조선족들은 무형문화유산 지정을 반기는 기류가 강하다”고 말했다.

그 배경에는 조선족 인구의 급감과 조선족 문화의 쇠퇴 분위기가 조선족들에게 아리랑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한껏 고취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1990년 192만명에서 2010년 183만명으로, 20년새 9만명(4.6%)이나 줄었다. 리 시인도 “실제 거주자는 100만명도 채 안 될 수도 있다”며 조선족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를 내비쳤다.



■ 조선족 속 정선아리랑

▲ 북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터전을 잡은 조선족들은 3대 아리랑을 조금씩 변형해 ‘조선족 아리랑’을 탄생시켰다.
아리랑은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이주한 조선족의 대표 민요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족 역사를 상징하는 아리랑은 가사나 가락이 현지실정과 역사적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거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선아리랑은 조선족 사회에서 그리 알려진 소리가 아니다. 이는 강원도 출신의 조선족이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 ‘정선아리랑’을 알고 있는 이주 1세대와 2세대가 점차 사라지는데 그 이유가 있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은 “정선아리랑 특유의 느린 가락은 조선족 사회에서 다른 민요에 묻혀 자리 잡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일제 강점기 당시 정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주민들의 수가 극소수인 데다 이주 2, 3세대로 내려오며 혈연적 고리를 잇는 고향의 노래가 애창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연길에서 연변예술대학 전화자(68) 교수(음악전공)가 전해주는 정선아리랑의 소리를 만날 수 있었다. 전 교수는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고인이 되신 어머니 최옥녀씨를 따라 연변땅에 정착했다. 현재 전 교수는 연변예술대를 정년퇴임했지만 여전히 학교 안팎에서 조선족과 한족을 대상으로 민요아리랑을 전파하는 일등공신이다. 그는 어머니가 불러주던 아리랑의 기억을 아련하게 떠올리며 취재진에게 정선아라리를 들려줬다.



눈이 올러나 비가 올러나 억수장마 질러나

높은 청천 저 산 밑에 먹구름만 지네


정선읍내 물레방아 허풍선이 빙글뱅글 잘도 돌아가는데

우리집의 낭군님은 나를 안고 도네


정든 고향을 떠나 머나먼 연변땅에 자리잡은 어머니 최옥녀씨의 대를 이어받은 전 교수는 “정선아라리에서 전해지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음률은 어느 민요에서 느낄 수 없는 애잔함으로 다가선다”며 “조선족에게 크게 전승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학교와 정선지역 학교 및 문화예술인 교류, 학술조사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정선아리랑’의 확대전파가 기대되고 있다. 중국 지린·헤이룽성/박창현·최경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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