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음악 창작으로 민족 魂 잇는 ‘아리랑 파수꾼’
김창회 작사가 - 동녕아리랑 등 200여곡 작사·앨범 제작 ‘열성’
전화자 연변대 교수 - 아리랑 편곡·제자 양성 전통 계승 고군분투

한민족은 예로부터 작문과 노래, 춤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향유하며 풍류와 운치를 즐겨왔다. 그 중심에 겨레의 노래 ‘아리랑’이 있다. 중국 조선족 사이에서도 아리랑은 문학과 음악 등 각 분야에서 저마다 고유의 뿌리를 내리며 독특한 양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족 이주역사의 애환과 한은 아리랑을 엮은 창작활동으로 발산되면서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다양한 장르로 전파되고 있는 조선족 아리랑의 문화예술 창작활동 현장을 현지 취재로 살펴봤다.


 

▲ 조선족 아리랑 전승을 위해 제자를 양성하는 연변대 예술대학 전화자 초빙교수(사진 가운데)와 제자교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국 헤이룽장성/박창현


■ 아리랑 창작활동

중국 내 조선족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활동이 왕성한 분야는 문학이다. 1951년 창간된 연변문학은 현재까지 매달 정기 발행되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민들의 정서를 아우르고 있다.

1957년부터 2년간은 ‘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 민족주의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개칭을 요구해 연변문학으로 현재까지 굳어졌다. 1983년도에는 8만6000부가 발행됐을 정도로 현지 주민들의 큰 관심을 모은 조선족 대표 문학지 중 하나다. 당시 연변문학을 이끈 주역이 아리랑문화에 큰 관심을 기울인 리상각 시인이다.

올해로 창간 16주년을 맞은 조선족 유일의 가사전문지 ‘해란강여울소리’도 빼놓을 수 없는 조선족들의 ‘소통 창구’다. 해란강여울소리는 작사가들의 터전이자 작곡가들의 샘터로 통한다. 1996년 용정인민방송국에서 등사판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이 가사전문지는 2006년 연변가사협회 기관지로 인정받았다.

현재 연변가사협회 산하 8개현을 제외하고도 동북3성에서 500여명의 회원이 아리랑 등 한민족 노래의 파수꾼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들 회원 중 뒤늦게 왕성한 문인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사가 김창회(77)씨를 만나기 위해 지난 6월 조선족의 터전인 중국 헤이룽장(흑룡강)성의 동녕을 찾았다. 동녕은 현재 4000∼5000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함경도 주민들이 상당수 이주해 정착한 곳이다.

김 씨는 6·25 전쟁 당시 일곱살의 나이에 충북 영동에서 이국땅 동녕으로 건너왔다. 청춘의 나이에는 이주생활의 외로움과 생계를 이겨내기 위해 문학 활동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노후로 접어든 지난 2010년 비로소 작사·작곡 공부를 하며 아리랑 전승 활동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시작한 작사가의 길이지만 그는 우리 민족과 겨레의 혼이 담긴 아리랑 가사를 창작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행복감에 빠져있다.

이처럼 조선족에는 김 씨와 같은 이주 1·5세대들이 조선족 아리랑의 전승 및 보전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김 씨는 2010년 조선족들이 대거 모인 아리랑축제에서 생애 첫 작사곡인 ‘동녕아리랑’을 무대에 올렸다. 이후 현재까지 200여개의 아리랑 가사 작사와 앨범 제작으로 ‘아리랑 전도사’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의 집 거실 한켠에는 전지에 손수 기록한 동녕아리랑 가사와 악보가 자랑스럽게 내걸려 있었다. 그에게 아리랑이 주는 의미에 대해 묻자 “아리랑은 내 인생이고, 내 인생도 곧 아리랑이다”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어 “아리랑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사랑의 마음이기도 하다”며 “아리랑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마음도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심장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동녕아리랑을 항상 들었고 이로 인해 병세도 많이 호전됐다고 ‘아리랑 예찬론’을 폈다. 그는 “약의 효능보다는 (아리랑이라는)음악의 효능이 더 컸던 것 같다”며 “우리 세대들이 알던 노래는 그저 자나 깨나 아리랑뿐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귀국 후에도 김씨가 직접 작사한 동녕아리랑의 음률이 귓가에 선하다.


아리랑 스리랑 아라리요 동녕아리랑 스리랑

대붕산 고개로 넘어간다 동녕아리랑 스리랑

탐스런 사과배 주렁주렁주렁

북국의 강남을 자랑하네 동녕아리랑 스리랑


■ 아리랑의 전승

▲ 아리랑 가사 창작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김창회(77·중국 헤이룽장성 동녕 거주·사진 왼쪽)씨가 현지 아리랑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족들 사이에서 문학 다음으로 활동이 활발한 분야는 음악이다. 하지만 조선족아리랑은 음악분야로서 독자적인 전승이나 연구가 진행되기 보다는 가극이나 무용 등 공연 분야의 작품과 어우러진 조선족의 민요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선족 민족음악을 전승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1957년 연길시에 설립된 연변예술학교를 들 수 있다.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명칭이 변경된 뒤 현재 연변대 예술대학으로 통합됐다. 음악 분야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연변대 예술대학은 조선족들에게 아리랑과 같은 다양한 한민족의 노래와 춤 등을 전수하고 있다. 이 대학은 중국에서 한국어와 중국어가 함께 사용되는 유일한 대학이기도 하다.

취재진은 양양출신 전화자(69) 연변대 예술대학 초빙교수를 만나 조선족 음악의 현 주소를 들을 수 있었다. 전 교수는 16세에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해 중등 교육을 마치고 연변대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 한국 국립국악원에서 2년간 연수를 받기도 했다. 그는 현재 ‘긴아리랑’ ‘강원도아리랑’을 ‘아리랑련곡’으로 편곡하는 등 조선족 민요의 창조적 전승과 제자 양성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전 교수에 따르면 조선족 사회에 뿌리 내린 아리랑은 주로 ‘밀양아리랑’이다. 조선족들의 돌잔치, 회갑연, 결혼식에서도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아리랑이다. 흥겨운 가락의 특성상 북만주 일대를 근거로 한 독립군들의 ‘광복군아리랑’으로 창작되기도 했다.

‘강원도 아리랑’ 역시 중국 조선족의 대표 아리랑 중 하나다. 가사와 음률이 이주생활의 고단한 삶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어 보편적 민요로 자리잡았다.


아리아리 아리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넹겨주세


우리집 시어머니 비우살 좋아

요잘난걸 나놓고 날 데려왔낭


하지만 아리랑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정선아리랑’의 전통가락을 조선족 내에서 듣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정선은 물론 강원도에서 이주한 사람이 매우 적어 자체적인 촌락공동체를 이루지 못했거나 해체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 교수는 “정선아리랑은 어머니가 전해주는 노래만 들었을 뿐 자주 접하지 못했다”며 “최근들어 아리랑에 대한 관심과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정선아리랑 가락에 빠져드는 조선족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조선족들이 새롭게 창작한 아리랑도 눈에 띈다. ‘아리랑련곡’은 김창석 작사, 김성민 작곡의 노래로 1980년 연변가무단의 공연작품으로 무대에 올라 1982년 연길시조조선족예술단의 자치주성립 30주년 기념공연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상가에 소재한 음반판매 코너에는 다양한 장르의 ‘아리랑CD’를 쉽게 볼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나주소

봄바람 순풍에 곱게 핀 앵두꽃을

머리에나 곱곱게 꽃아를 주니

내 사랑 깊은 정 출렁 파도를 치네


‘아리랑련곡’은 정선아리랑의 느린 가락과 진도아리랑의 빠른 가락을 조화시켜 만든 노래로 전해진다. 전반부는 정선아리랑 가락을 바탕에 깔고 후반부는 진도아리랑의 변주로 이어간다. 정선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의 전통 소리에서 다소 변형됐지만 연변예술대학 학습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전 교수는 “조선족은 물론 한족 학생들도 아리랑 소리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며 “한민족의 소리가 중국과 세계에 널리 퍼져나간다는 자부심에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말했다.

중국 지린성·헤이룽장성/박창현·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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