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갱을 대기하고 있는 광부들.
▲ 입갱을 대기하고 있는 광부들.

강원도민일보사는 창간 29주년을 맞아 폐광지역의 소중한 탄광문화를 재조명하고 지역발전의 성장 동력으로 끌어 올리기 위한 ‘소중한 탄광문화 유산을 지킵시다’ 캠페인을 전개한다.

정선군과 지역살리기 공동추진위원회 등 주민단체는 올해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폐특법) 개정에 한 목소리를 제기, 2045년까지 20년 연장되면서 폐광지역의 장기적인 비전을 모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폐특법에 의해 탄생한 강원랜드는 지역 탄광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다. 전국 최대 민영탄광이었던 △동원탄좌의 시작 △석탄산업의 부흥과 쇠락 △새로운 탄생,탄광문화공원 이란 주제로 3회에 걸쳐 탄광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②석탄산업의 부흥과 쇠락

철저한 체력 및 신체검사를 빗대 당시 ‘동원탄좌 입사는 육사 입학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한창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는 경쟁률이 무려 50대 1에 달하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정부가 농축산물 수입정책을 실시하며 국내산 가격이 급락하자 당장 생활고를 겪던 농민들이 탄광촌으로 몰려들었다. 높은 임금과 사택 지급, 자녀 교육비 지원 등이 탄광촌을 매력 있는 직장으로 인식하게 하는 기반이었다.

1980년대 초, 7급 공무원 월급이 11만 원 정도일 때 광부의 평균 월급은 25만 원을 상회했다. 이처럼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목돈을 만지는 주민들이 증가하자 ‘지나가는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광부들과 그 가족들의 삶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탄광 갱내 노동자의 법적 노동시간은 여섯 시간이었지만 실제로 여덟 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컴컴한 막장 안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탄가루를 들이마시며 고된 작업을 감내해야 했다.

늘어나는 탄광 가족들의 거주지 마련을 위해 1970년대 내내 대대적인 사택 건립이 이루어졌지만 내부 구조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벽돌 찍어내듯이 날림공사로 세워진 사택은 방음도 되지 않았고 상하수도 시설이나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다. 탄광촌 사택을 두고 ‘닭장’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하소연을 한 것도 바로 이런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남편이 탄을 캐러 간 사이, 아이들과 함께 이런 사택을 지키고 있는 아내들의 고충도 컸다. 방음이 안 되다 보니 작업을 갔다가 돌아와 남편이 잠들면 행여 깨기라도 할까봐 집안일을 할 수도 없었고, 어린 아이들이 보채면 아무리 추운 날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몇 시간을 서성거려야 했다.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전 세계를 넘어 우리나라에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석유파동이 우리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석탄산업은 이때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으로 석탄이 급부상한 까닭이었다. 석유파동 이후 국내 모든 탄광은 일시에 증산 체제에 들어갔으며, 생산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석탄 가격은 날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런 호황의 시절도 1980년대 중반까지였다. 석유파동이 석탄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듯이, 석탄산업의 쇠락을 알리는 계기 역시 석유파동의 진정과 석유 가격 하락이었다. 1980년대 중 후반 들어 원화 가치와 함께 석유 가격이 크게 하락하자 석유와 가스가 일시에 석탄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정부의 청정에너지 정책과 맞물려 가정에서의 연탄 수요마저 급격히 줄면서 1980년대 들어 연탄 가격은 80% 이상 급격히 하락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부에서는 석탄산업이 당면하고 있는 구조적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사양길에 접어든 석탄산업을 더 이상 회생시킬 방법이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정부에서는 ‘적정 생산과 구조조정을 통한 석탄산업의 건전한 육성’이라는 취지 아래 1986년 12월 31일 석탄산업법을 공표한 데 이어 1987년 4월 석탄산업 구조조정을 담당한 기구로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을 발족했다. 이 합리화사업의 주요 골자는 무연탄의 중장기 수급계획 수립, 탄광업체 집약화와 채탄 기계화를 통한 생산성 제고, 인원 감축 및 적정 임금 수준 유지, 후생복지 향상, 자생력 제고 등이었다.

▲ 퇴근하는 광부들.
▲ 퇴근하는 광부들.

합리화사업의 방안 중 하나로 ‘폐광(廢鑛)’이 검토된 것은 분명했다. 탄광에 매달려 사는 수많은 지역민들로서는 듣기조차 끔찍한 단어였지만, 합리화사업 추진 과정에서 일부 탄광에 대한 폐광은 불가피한 것도 분명했다.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을 추진하자마자, 경쟁력 강화에 한계를 느낀 많은 수의 소규모 탄광들이 일시에 폐광을 신청했다. 사업주는 물론 광부들에게까지 보상과 위로금을 지급하는 합리화사업의 방침이, 탄광 사업주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여겨진 것이다.

합리화사업 1년째인 1989년에만 전국적으로 130개 탄광이 문을 닫았다. 사북과 고한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9년 한 해 동안 지역 내 6개 탄광이 문을 닫았으며, 이들 탄광에서 일하던 1373명, 그 가족까지 포함해 총 5000여명이 하루아침에 생계수단을 잃었다. 1985년 전성기 때 2만 3000여 명에 달했던 사북 인구는 1990년 1만 7000여 명으로 크게 줄었고, 사택과 학교는 줄줄이 문을 닫았다. 탄광이라는 단일산업에 의존하던 사북과 고한의 경제는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이었던 동원탄좌도 2004년 폐광의 여파를 피하지 못한 채 마침내 문을 닫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주현 joohyu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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