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3개 사단 섬멸 최대 격전지
이승만 전 대통령 파로호 명명
6사단 총공세 화천댐 탈환

▲ 파로호 전투 전적비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웠노라…’.

파로호는 남북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최대 격전지다.

파로호라는 이름조차 전쟁과 관련이 깊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전쟁 당시 “1951년 5월, 중공군 제10군과 제25군, 제27군과 중공군 해병 1연대를 수장시켰다”며 호수 이름을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 파로호(破盧湖)라 명명했다.

1951년 5월 20일, 중공군은 ‘4월 총공세’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총공격을 예고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총 공세는 미 제24사단과 국군 제6사단의 거센 응전에 또 다시 실패로 끝났다.

화천댐 탈환을 명령받은 국군 제6사단은 용문산과 홍천강을 잇는 전선에 방어진지를 구축,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물리쳤다.

특히 국군 제6사단은 도주하는 중공군을 화천지역까지 추격 섬멸했다.

이 과정에서 제6사단은 이틀 동안 중공군 1만7000명을 사살하고, 2000명을 포로로 붙잡는 사상 유례없는 전과를 올렸다.

이 무렵 미24사단의 21연대, 미7사단의 17연대는 화천-춘천, 가평-지암리 축선을 완전히 장악, 남쪽의 아군 진출선과 함께 삼각형의 포위망을 형성했다.

포위망에 갇힌 중공군은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모두 섬멸됐고, 국군은 중공군 3만8000여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후 5월 24일, 중공군의 5월 공세는 전 전선에서 멈췄고 국군은 화천댐을 탈환했다.

국군은 특히 이 전투의 승리로 북으로 진격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 화천 군민들은 파로호에서의 전과를 기념하고 희생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75년 파로호 정상에 전적비를 건립했다. 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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