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0 (수)

[요즘에] 도파민꽃이 피다

▲ 이현준 소설가 한림대학교 강사
▲ 이현준 소설가 한림대학교 강사

어머니는 올해 아흔둘이다. 자식 일곱을 키우느라 쉼 없이 달렸다. 남편과 일곱 아이들 도시락을 꼬박꼬박 챙기던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인근 텃밭을 살뜰히 운영하던 바지런한 분이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몇 해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고, 걸음이 느려지고, 말도 예전처럼 부드럽지 않다. 의사는 도파민 신경세포가 70%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몸 안의 작은 화학물질 하나가 한 사람의 생을 얼마나 무겁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나는 그때 처음 실감했다. 원주에서 사시던 분을 강제로 춘천으로 모셔왔고 지척에 사는 누나와 함께 격주로 어머니를 돌봤다. 어머니는 새로 노인유치원을 다니시기 시작했다. 유치하다며 노인정도 안 가던 분이 친구가 생기자 집보다 더 편안해 하셨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최근 손 떨림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약을 바꾸거나 운동을 더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담당의는 여러 변수도 있지만 계절 변화에 따라 기온이 변하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미스터리했지만 반가운 일이었다.

‘사랑과 호르몬’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던 날이었다. 사랑을 관장하는 호르몬 중에 갈망이나 성취, 쾌감 등의 감각과 관련된 신호를 전달하는 호르몬이 도파민이다. 한참 설명하다가, 문득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내, 너무나도 무심한 아들이었다.

외모에 관심 없던 어머니가 옷을 고르거나 머리에 물을 묻혀 곱게 빗고 계셨던 것의 이유를 알았다. 염색할 때가 되었다는 말도 더 자주 하셨다.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 어머니 옆에 앉아서 물었다.

“지난번에 그 앞이 잘 안 보인다는 할아버지는 요즘 어떠셔?” 대답이 없다. 나도 재촉하지 않고 TV에 시선을 뒀다. 3분쯤 흘렀을까, 어머니가 작은 에피소드를 말하신다. 그 할아버지가 직원들에게 요청해 어머니가 계신 호실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막상 와서는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직원들과 함께 돌아가셨다며 웃으셨다. 어머니는 “영감님, 나랑 사귀려면 돈이 많아야 해요. 그래야 맛있는 것 사줄 것 아니에요”라고 하셨단다. 엄마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 뒤로도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셨다. 처음엔 눈도 잘 안 보이고 음식도 다 흘린다고 했는데, 이제는 옷도 잘 입고 멋있게 생겼다고 하신다. 죽었던 신경세포가 도파민을 쏟아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습관처럼 말씀하시는 ‘고목에 꽃이 핀’ 순간이다.

고단한 삶을 사신 아흔두 살의 어머니에게 달콤한 쉼의 꽃이 피고 있었다. 아빠, 뭔가 달콤한 향이 나! 어머니 댁 현관문을 열 때, 8살 딸아이의 말이 헛말은 아니었나 보다. 어머니의 도파민 꽃이 한창인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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