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동해를 찾았다 틈을 내 무릉계곡에 올랐다. 금란정(金蘭亭)에서 땀을 식히다 폭염을 못참고 계곡으로 내려가 벽계수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방바닥 같은 커다란 바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영조 30년(1754년) 1월1일 창덕궁은 분주했다.
왕은 새해를 맞아 태묘(太廟)와 영희전(永禧殿)에 인사했다. 이 해 영조는 60세 주갑(周甲)이었다.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도 찾아 절했다. 그리고 어제(御製)인 술회시(述懷詩)와 서대기(犀帶記)를 쓰라고 명했다. 서대는 일품(一品) 관리가 허리에 두르던 띠다.
앞서 관동어사(關東御史) 이현중(李顯重)이 아룄다.
“삼척부사 이협(李埉)이 홍서대(紅犀帶)를 얻었습니다. 전하는 말로는 계유년(1393년) 태조대왕이 삼척은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당시 호장(戶長)에게 특별히 서대를 내리셨습니다. 그뒤 여섯 번째 계유년(1753년)이던 작년에 다시 얻었다 합니다.”
영조가 호장 김상구(金尙矩)를 올려 보내게 했다. 서대를 가지고 오니 불러서 보고 참봉(參奉)에 임명했다. 그러자 승지 이수득(李秀得)이 아룄다. “김상구에게 벼슬을 제수하면 반드시 먼 지방 백성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열어 주게 될 것이니 마땅한 일이 아닐 듯합니다.” 영조가 대꾸했다. “권세는 임금에게 있다. 승선이 막으려 하는가?” 이수득을 경질하고 사헌부 집의(執義) 임위(任瑋)를 승지로 삼았다.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서대의 내력과 연기(年紀)는 상세하지 못하다. 김상구가 가져온 것은 상줄 만한 공로가 없다. 승지가 아뢴 것은 책임을 다한 것이다. 잘잘못을 밝혀 바로 잡는 사람이 없었다. 판서나 승지도 부당함을 바로잡지 않았다. 애석하다.”
얼마나 잤을까? 냉기에 눈을 뜨니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삼화사(三和寺) 종소리만 빈 산을 지키고 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바위에 숱한 이름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
‘眞珠伯 李埉(진주백 이협)’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진주는 삼척의 옛 이름이다. 삼척부 객관(客館) 진주관(眞珠館)에서 유래했다. 진주백은 곧 삼척부사다. 꿈결에 봤던 이협의 이름이 5척 단신 허리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는 1753년 부임했다 2년뒤 진주목사로 갔다.
그 위에 1743년부터 2년여 삼척부사로 일한 崔尙鼎(최상정)의 이름도 보였다. 옆에는 정조 20년(1796년) 삼척부사로 제수된 兪漢雋(유한준)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돌에 새겨져 있다. 13년 동안 일기 ‘흠영(欽英)’을 썼던 유만주(兪晩柱·1755~1788년)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썩은 도끼자루를 쥐고 두타계곡을 빠져 나오다 다리 위에서 무릉반석을 내려다 봤다. 청옥처럼 맑은 벽간수가 그 옆을 빠르게 지나 동해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집채만한 바윗돌에 이름을 새기며 불멸을 꿈꿨던 나그네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