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0 (수)

[최동열의 요산요설(樂山樂說)] 32. 산에서 체화하는 겸손의 미덕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

▲ 설악산 수렴동·구곡담 계곡의 쓰러진 나뭇등걸,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 설악산 수렴동·구곡담 계곡의 쓰러진 나뭇등걸,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 예전에 설악산의 수렴동∼구곡담 계곡을 등산하다가 이런 글귀를 만난 적이 있다. 등산로 위에 비스듬히 쓰러져 누워 고사한 고목의 나뭇등걸에 쓰여 있는 글귀였다. 등걸 밑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몸을 움츠렸다. 길 위에 아름드리 고목이 걸쳐 있으니 부딪치지나 않을까, 썩은 나무가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한 번 더 나무 밑 공간을 살피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며 살피는 곳에 인생의 큰 가르침을 주듯, 철학적 경구가 새겨져 있으니 그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심오한 이 글귀는 조선시대 명재상인 맹사성의 일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60∼1438년).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태종·세종대에 활약한 문신으로, 소박한 삶을 실천한 청백리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다.

그 맹사성이 이십대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한 고을의 수장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우러르는 자리에 오르면서 자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 맹사성이 어느 날 고명한 선사를 찾아가 고을을 다스리는 최고의 덕목을 물었다. 그런데 선사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많이 하면 된다.” 너무 평이한 말에 실망한 맹사성이 더 들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선사가 “차(茶)나 한잔하고 가라”며 붙잡는다. 이어 차를 따르는데, 찻잔에 물이 넘쳐 방바닥이 흥건하게 젖을 지경인데도 멈추지 않는다. 맹사성이 그만 따르라고 하자, 그때 선사의 일갈이 터진다. “찻잔의 물이 넘치는 것은 알면서도 알량한 지식의 자만이 넘쳐 스스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왜 모르는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황급히 방을 나서던 맹사성이 문틀에 쿵 하고 머리를 세게 부딪치자, 선사가 껄껄 웃으며 덧붙인 말이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돈수불박·頓首不搏)” 였다고 한다. 이후 맹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다.

사실 겸손이나 겸양은 현대인들이 더 깊이 새겨야 하는 미덕이다. 타인과의 관계로 얽힌 오늘날의 사회는 부딪칠 일이 정말 많다. 부(富)나 권력이 넘쳐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겸손의 미덕을 묘약처럼 처방해야 하는 세상이 바로 요즘이다.

그런데, 산에 가면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참 많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걷다가는 나뭇가지에 찔리고 돌계단에 부딪혀 상처를 입기 십상이니, 등산 자체가 스스로를 낮추고 삼가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강릉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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