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흘러흘러 산을 지나고 / 한없이 시를 지어 노래 부를 때 / 차가운 회수 강에 비가 내린다 // 해오라기 앉은 강가에 안개 짙은데 / 사람들은 뱃전에서 물고기를 사네 // 오래된 절집에 잠시 머물다 / 밤 깊어 스님 방에서 자다 / 꿈결에 놀라 일어나 한숨을 내쉰다 // 시름은 한없이 밀려오는데 / 눈물로 답하는 편지를 쓰네.’
송(宋)나라 휘종(徽宗) 조길(趙佶·1082~1135년)이 쓴 시 ‘임강선(臨江仙)’이다. 그는 1100년 즉위해 26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다. 달은 차면 기울고 꽃은 피면 진다. 1127년 금(金)나라 군사 앞에 무릎을 꿇고 북방 오지로 끌려가 생을 마쳤다.
송사(宋史)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휘종이 나라를 잃은 까닭을 보면 서진의 혜제처럼 백치도 아니었고, 동오의 손호처럼 잔악하지도 않았다. 조정에는 조조나 사마사처럼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도 없었다. 약삭빠른 황제가 사적인 욕심을 갖고 편견으로 일관하면서 올바른 인물을 배척하고 잘못된 사람들을 끌어들여 국정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욕망에 빠져서 올바름을 버린 군왕 중에서 패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 중에 휘종이 가장 심했다. 이에 특별히 기록하니 후세가 계율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는 즉위초 역대 황제처럼 검소한 생활과 올바른 정치를 시도했다. 비판적인 의견도 받아들이고 인재를 등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몇 년 가지 않아 능력과 인품에서 밑천이 드러났다. 정치가 그냥저냥 굴러가자 눈은 멀고 귀는 닫혔다.
간신들의 농간과 권모술수가 판쳤다. 예술에 능했던 황제는 그림과 글씨, 놀이에 빠졌다. 밤마다 홍등가를 오가며 기생 이사사(李師師)를 탐닉했다. 권신들은 이 틈을 타 국정을 농단했다. 나라는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는 낡은 마차와 같았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도적이 됐다. ‘수호전’은 이 시절의 논픽션이다. “휘종 황제는 정말 못 하는게 없었다. 황제 노릇을 빼고!!(宋徽宗諸事皆能 獨不能爲君耳!!)”
정복자 금나라는 휘종을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뜻의 ‘혼덕공(昏德公)’이라고 불렀다. 그는 북방에서도 가장 추운 하얼빈으로 끌려가 짐승 가죽을 걸치고 토굴에서 동물처럼 살다 1135년 죽었다. 군사들은 시신을 반쯤 태운 다음 창고에 놓고 불을 붙이는 기름으로 썼다고 전한다.
조길의 시 ‘임강선’를 다시 보자.
‘꿈결에 놀라 일어나 한숨을 내쉰다(夢魂驚起轉嗟吁)’는 시구는 그 연원이 있다. 1125년 선화(宣和) 을사년(乙巳年) 겨울. 제위를 아들 흠종(欽宗)에게 물려주기 1년 전 휘종은 전쟁의 불길을 피해 박주(亳州)로 피난가는 길이었다.
그가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걱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국운이 다한 나라와 어진 백성들? 아니다. 기록은 여인들과 재물이었다고 전한다. 송 황제가 금나라에 굴복한 1127년 정강지변(靖康之變) 전후 기록에는 황실에 여인이 6000여 명이오, 재물 서화 문화재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사관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宜其亡國)”
역사는 돌고 돈다.
구치소 수감후 특검을 오가는 전직 대통령을 지켜보며, 한 정권이 저물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환국(換局)을 목도하며 역사 속 보잘 것 없었던 한 인간을 소환한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