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6년(1730년) 9월9일. 맑았다. 영조는 상을 당해 경덕궁에 머물고 있었다.
형조참판 김유경이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 억울하게 죽거나 옥고를 치른 인사들에 대한 수사 기록의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했다. 그 가운데 삼급수(三急手)라는 생소한 단어가 나온다.
삼급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8년 전, 경종2년(1722년) 사화(士禍)의 방아쇠를 당겼던 소론계 목호룡(睦虎龍)이 꾸몄던 무고에 처음 등장했다.
“노론 일파가 경자년(1720년) 숙종 국상(國喪) 당시 혼란을 틈타 경종을 해치려 했다”고 고변했다. 그러면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칼로 죽이려 했다는 대급수(大急手), 수입산 환약(丸藥)으로 독살하려 했다는 소급수(小急手), 유언비어를 퍼뜨려 쫓아내려 했다는 평지수(平地手).
그 무렵 소론은 세자 균, 곧 경종을 지지했다. 노론은 연잉군, 즉 영조를 밀었다. 세자는 생모 장희빈이 죽자 병이 도졌고 숙종은 걱정이 커져 갔다. 왕은 1717년 노론계 이이명을 불러 독대(獨對)를 하고 세자 교체문제를 협의했다. 이를 계기로 소론은 세자 균 수호에, 노론은 연잉군 추대에 혈안이 됐다. 양 세력간 극한 대치 중 1720년 숙종이 죽고, 세자 균이 급작스럽게 보위에 오른 것이다.
정권 교체후 가만히 앉아 죽을 노론이 아니었다. 경종의 건강과 후사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4대신(大臣)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는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건의했다. 1721년 신축년(辛丑年) 8월 연잉군은 왕세제(王世弟)가 됐다. 노론은 내친김에 그해 10월 왕세제의 청정(聽政)도 요구했다.
작용이 있으면 반(反)작용이 있게 마련, 소론이 반격에 나섰다.
1721년 12월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이 대리청정을 요구한 4대신을 정조준해 “왕권 교체라는 역모(逆謀)를 꾀했다”고 고했다. 노론 정권은 무너지고 권력은 소론으로 넘어갔다. 환국(換局)이다.
졸지에 김창집은 거제, 이이명은 남해, 조태채는 진도, 이건명은 고흥 나로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대신 소론이 권력을 석권했다.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힘의 진공사태를 빠르게 메웠다.
하지만 소론은 여전히 배가 고팠다.
해가 바뀌어 1722년 임인년(壬寅年) 3월 지관(地官)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 시해를 모의했다는 삼급수설을 고변했다. 증거라며 4대신들의 피붙이와 추종자들을 하나하나 거명했다.
국청(鞫廳)이 설치됐다. 역모에 가담했다고 지목된 사람들의 한 맺힌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덥고 붉은 피가 산하를 물들였다.
4대신은 곧바로 사사(賜死)됐다. 장형으로 죽은 자가 30여 명, 정법(正法)으로 처리된 자가 20여 명, 국사범 가족으로 체포돼 교살된 자가 13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에 이르렀다. 또 유배된 죄인이 114명, 연좌된 죄인이 173명. 천지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음모론자이자 가짜뉴스 생산자인 목호룡은 새 정권에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동성군(東城君)이라는 훈작도 받았다. 벼락출세였다.
그러나 소론 정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1724년 8월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단명하자 정국은 다시 반전됐다.
왕세제 연잉군이 보위를 이어 받았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신임사화는 무고로 밝혀졌다. 노론의 철천지원수인 김일경이 처형되고 목호룡의 머리통은 당고개에 내걸렸다. 효수(梟首)였다.
300년 전 정치 권력을 놓고 노론과 소론이 사생결단했던 붕당의 흑역사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