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0 (수)

[남궁창성의 인문학 산책] 특검과 의금부(義禁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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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16년(1416년) 1월13일. 정초 엄동설한에 의정부가 백관(百官)을 이끌고 창덕궁 뜰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불충한 죄는 왕법(王法)에 있어서 주륙(誅戮)에 해당하는 것으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역신(逆臣) 민무구(閔無咎)와 무질(無疾)이 주륙을 당해 그 아우인 무휼(無恤)과 무회(無悔)는 마땅히 감계(鑑戒)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패역(悖逆)한 마음을 품고 무망(誣妄)한 말을 꾸며 성상의 덕(德)에 누를 끼치고자 했습니다. 형들이 죄도 없는데 죽었다고 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불충한 죄가 뚜렷하게 나타났으니 법대로 처치함이 마땅합니다. 대의로서 결단해 전형(典刑)을 바로 잡고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내 어찌 사랑하여 보호하겠는가? 다만 어미 송씨(宋氏)가 연로(年老)하고, 중궁(中宮)이 몹시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이다(태종)” “옛사람이 이르기를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은 즉시 끊어 버리라’고 했습니다(정승 하윤(河崙·1347~1416년)” 마침내 태종이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정승의 말이 옳다.”

곧이어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이맹진(李孟畛)이 원주로, 송인산(宋仁山)이 청주로 급파됐다. 고을 수령들에게는 굳게 지켜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만약 자진(自盡)하고자 하거든 금하지 말라는 밀지가 내려갔다. 이맹진이 15일, 송인산이 16일 원주와 청주에서 돌아와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자진했다”고 고했다.

▲ ▲금오좌목(金吾座目). 1750년 제작된 의금부 관리들의 모임을 그린 금오계첩도(金吾稧帖圖).  사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금오좌목(金吾座目). 1750년 제작된 의금부 관리들의 모임을 그린 금오계첩도(金吾稧帖圖). 사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태종 이방원 집권(1400~1418년)에는 여장부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년) 민씨(閔氏)의 힘이 적지 않았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을 도와 보위에 오르게 했다. 조선초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을 지낸 민제(閔霽)의 딸이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태종이 궁궐 여인들을 가까이하면서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잦아지고 틈이 벌어졌다. 설상가상. 외척으로서 아버지와 누이의 권세를 믿고 민씨 네 형제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자 조정 안팎에서 탄핵 여론이 점점 높아 갔다.

1409년 태종의 장인인 민제가 죽자 대신들은 민무구와 무질 형제의 처형을 요구했다. 왕은 일단 섬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이듬해 종친과 조정이 다시 강력하게 요구하자 두 형제를 자진하도록 했다.

몇 년 후 원경왕후가 병석에 눕게 되자 나머지 민무휼과 무회 두 형제가 문안차 입궐했다. 이들은 누이에게 먼저 간 두 형님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정국은 다시 파란에 휩싸였던 것이다.

결국 무휼·무회 두 형제도 국문을 받고 귀양길에 올랐다. 그리고 1416년 1월 유배지에서 사사됐다. 누이를 왕비로 두었던 민씨 네 형제는 외척의 몸이 된 것이 화근이 되어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자의반 타의반 목숨을 끊었다.

▲ ▲정선(鄭敾·1676~1759년)이 1729년 그린 의금부도(義禁府圖) 사진/일암컬렉션
▲ ▲정선(鄭敾·1676~1759년)이 1729년 그린 의금부도(義禁府圖) 사진/일암컬렉션

민씨 형제들의 저승길을 동행했던 의금부(義禁府)는 조선 역사 500여 년 동안 주요 장면마다 등장하는 국왕 직속의 특별 사법기관이다. 서울 종로 SC제일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왕부(王府), 조옥(詔獄), 금부(禁府), 금오(金吾)라고도 불렀다. 역모 사건이나 유교 질서에 어긋나는 강상죄(綱常罪) 등을 주로 다뤄 양반재판소, 정치재판소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사법기관으로 사헌부, 형조, 포도청 등이 있었지만 의금부는 중대 사건이나 각종 미해결 사건을 다뤄 최종 판결기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1457년 단종애사(端宗哀史)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왕방연(王邦衍)도 의금부 소속 관리였다. 그는 단종 복위사건이 발각돼 영월에 유배중인 노산군(魯山君)에게 사약이 내려질 때 책임을 맡아 서울과 영월을 오고간 비운의 의금부 도사(都事)였다.

‘천만리 머나 먼 길 / 고운 임 여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 냇가에 앉아 있으니 / 저 물도 내 맘 같아서 / 목메 울며 가는구나.’ 악역을 맡았던 금부 도사 왕방연이 지은 시다.

1597년 4월1일 옥문(獄門)을 나선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백의종군 길에는 의금부 도사 이사빈(李士贇), 서리 이수영(李壽永), 나장 한언향(韓彦香)이 동행했다. 같은 달 13일 어머니 부고를 접해 비통해 하며 빈소를 지키는 상주(喪主)에게 길을 재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서슬이 시퍼런 금부의 서리였다.

내란특검, 김건희특검, 채상병특검 등 3대 특검의 위세가 대단하다. 압수수색과 소환 조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시대 착오적인 비상계엄과 탄핵 정권이 배설한 실정(失政)의 후과(後果)다. 경험하지 못한 금부(禁府)의 힘을 미루어 실감하는 초가을 아침이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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