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0 (수)

[남궁창성의 인문학 산책] 유토피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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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대학에서 철학개론을 들으며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유토피아(Utopia). 20대 청년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어느 곳에도 없다는 의미라는데 놀랐다. 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이상향(理想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철렁”하고 낙담했다.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1478~1535년)가 1516년 라틴어로 쓴 소설의 제목이자 얘기 속 가상의 섬나라다. 원제목은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한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대단히 훌륭한 소책자(Libellus vere aureus, nec minus salutaris quam festivus, de optimo rei 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다.

▲ 영국의 법률가, 사상가, 정치가 그리고 기독교 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유토피아’의 저자토마스 모어.
▲ 영국의 법률가, 사상가, 정치가 그리고 기독교 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유토피아’의 저자토마스 모어.

토머스 모어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대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카스티야 국왕 카를로스와의 무역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대륙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친분이 있던 에라스 무스의 제자 페터 힐레스를 만난다. 페터 힐레스는 그 자리에서 포르투갈 탐험가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를 소개한다. 얼마후 토머스 모어는 라파엘을 높이 평가하고, 헨리 8세의 정치고문이 될 것을 권한다. 하지만 라파엘은 왕을 비판하면서 유토피아라는 나라를 소개한다. 토머스 모어는 “도대체 유토피아가 어떤 섬이냐?”고 묻는다.

라파엘은 답한다. “유토피아는 경제는 공산주의, 정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또한 교육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상적인 나라입니다!”

토머스 모어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리고 묻는다. “상당수 내용이 너무나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모든 것에 다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유토피아 공화국에서 시행되는 것 중에서 아주 많은 것이 여러 나라에서도 시행됐으면 좋겠습니다.”

▲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 목판 병풍
▲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 목판 병풍

서양에 유토피아가 있다면 동양에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다. 오류(五柳)선생 도연명(陶淵明·365~427년)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다.

무릉 사람이 물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다 길을 잊어버렸다. 복숭아 나무 숲을 지나 산에 있는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빛을 따라 들어가니 환하게 밝아지며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땅은 평평하고 드넓으며 집들이 가지런했다. 좋은 밭,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가 가득한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전란을 피해 정착했다고 했다. 바깥 세상과 이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서 어부가 온 것을 신기해하며 환대했다. 어부는 며칠 동안 꿈을 꾸듯 지내다 떠났다. 이별하는데 한 사람이 “외부 사람들에게 이 곳은 말할 게 못됩니다.”라고 말했다.

작별후 다시 와보겠다는 마음에 오고간 길 이곳저곳에 표식을 남겼다. 고향으로 돌아와 고을 태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이 그 흔적을 따라 이상세계를 찾아 헤맸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뒤 ‘무릉도원’은 속세를 떠난 평화로운 이상향을 상징하게 됐다.

이제는 안다. 젊은 시절 꿈꿨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은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평등한 무등(無等)의 대동(大同) 세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 ‘어부사’를 저술한 굴원 선생
▲ ‘어부사’를 저술한 굴원 선생

여기 현실적이고 교훈적인 서사가 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탓하며 강호를 떠돌다 결국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 굴원(屈原·B.C. 343~B.C. 278년)이 은자(隱者), 어부와 주고 받았다는 어부사(漁父辭)다.

어부 : “당신은 초나라의 삼려대부가 아니시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소?”

굴원 : “세상이 온통 다 흐렸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므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소.”

어부 : “성인은 사물에 막히거나 걸리지 않고 세상과 함께 잘도 어울리니, 세상 사람이 다 흐려져 있거늘 어찌하여 흙탕물 휘저어 그 물결을 날리지 않으며, 뭇 사람이 다 취해 있거늘 어찌하여 그 찌꺼기를 씹고 그 밑술을 들이마시지 않고, 무엇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고상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소?”

굴원 : “내가 듣건데,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고 했소. 어떻게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망정, 어떻게 희고 흰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더러운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단 말이오?”

어부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노를 두드리면서 노래하며 떠나갔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유토피아와 무릉도원은 없다. 악(惡)과 선(善), 부정(不正)과 정(正)의 경계마저 점점 더 허물어지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나도 시인의 노래보다 어부의 노래가 점점 더 편안해지니 큰 도를 깨달은 셈이다.

깊은 밤 낭랑한 귀뚜라미의 시를 향수병에 담아두고 싶은 계절이다. 긴 연휴, 속세를 떠나 속리산(俗離山)으로 갈까? 고개에 서면 머리 깎고 스님을 꿈꾼다는 단발령(斷髮嶺)에 오를까?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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