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0 (수)

[최동열의 요산요설(樂山樂說)] 45. 험산 고갯길을 넓힌 죄를 묻다니

00:00
00:00
1.0x

애민의 정 돋보이는 대관령 옛길

▲ 대관령 옛길 반정의 표석
▲ 대관령 옛길 반정의 표석

대관령 옛길은 영동∼서를 잇는 관문답게 수많은 옛이야기를 품고 있다. 조선 중기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고형산(高荊山·1453∼1528년)과 관련된 얘기는 대관령 고갯길이 전하는 스토리 중 압권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조선 중종 임금 때 호조·형조·병조판서와 우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청백리이다. 1511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에는 강릉성과 삼척진 등 동해안 5개 지역과 해안가 포진에 성을 쌓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선견지명까지 실행에 옮겼으니, 국토방위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목민관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강릉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동대로를 정비한 일도 그의 공적이다. 그런 그가 대관령 길을 넓힌 죄로 사후(死後)에 부관참시라는 극형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니,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험준한 산길을 백성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하도록 정비하는 데 사재(私財)까지 썼다면 애민(愛民)의 정이 돋보이는 행적이다. 그런데도 형을 받은 이유는 그의 사후에 발생한 전란 중에 침입한 적군의 일부가 강릉에 상륙,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직행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대관령 길을 넓힌 일이 임금의 진노를 산 때문이라고 한다.

나중에 물산과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대관령 길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고충과 불편을 살핀 그의 공적을 재평가해 조정에서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포상하지만, 대관령 길에 전해지는 이 일화는 과거 왕조시대에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 인식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확인케 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도즉안전은 ‘길이 없으면 안전하다’는 뜻이다. 곧게 펴진 좋은 길은 적의 침입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예로부터 병가(兵家)에서는 길을 내는 것은 걱정을 더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수많은 외침에 시달린 국난 극복사를 살펴보면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극적 방어책으로 인해 우리의 육로 교통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열악한 사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城)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고 했다. 사통팔달 가도를 연결한 로마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 평화의 전성기를 구가한 반면에 동시대 중국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는 만리장성을 쌓는데 국력을 허비하고 민심이 이반되면서 결국 단명 제국으로 무너졌다. 개인이든, 국가든, 벽을 치고 보신에 급급하기보다는 길을 닦아 외부와 소통·교류하는데 힘써야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오늘 대관령 옛길을 등산하며 다시 진중하게 되새긴다. 강릉본부장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추천 많은 뉴스
지금 뜨고 있는 뉴스
강원도민일보를 응원해주세요

정론직필(正論直筆)로 보답하겠습니다

후원하기
  •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후석로462번길 22, 강원도민일보사(후평동 257-27)
  • 대표전화: 033-260-9000
  • 팩스: 033-243-7212
  • 법인명: (주)강원도민일보
  • 제호: 강원도민일보
  • 사업자등록번호: 221-81-05601
  • 등록번호: 강원 아 00097
  • 등록일: 2011-09-08
  • 창간일: 1992-11-26
  • 발행인: 김중석
  • 편집ㆍ인쇄인: 경민현
  • 미디어실장: 남궁창성
  • 논설실장: 이수영
  • 편집국장: 이 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김동화
ND소프트
모바일버전